최근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삼체'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예전에 소설로도 읽었지만,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복잡해서 이해가 쉽지 않았지만, 드라마는 간략하게 요점만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끌 수 있는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삼체인의 특성과 유사한 외계인이 과거 다른 드라마에서 이미 등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1987년에 방영된 "스타트렉: 넥스트 제너레이션"의 시즌 1, 에피소드 18편입니다. 제목은 "Home Soil"입니다. 스토리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어떤 행성을 테라포밍을 하려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해당 행성에는 지적 생명체가 없었기 때문에 바로 진행하려고 했고요. 그런데, 갑자기 드릴 같은 기계가 오작동을 하면서 인간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엔터프라이즈호는 이 사건을 조사하려고 이 행성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들은 사고 현장에서 빛이 나는 이상한 크리스털을 발견하게 되는데, 마치 그 크리스털이 살아 있는 거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자세한 분석을 위해서 그걸 채취해서 엔터프라이즈호로 가져오는데, 엔터프라이즈 호의 컴퓨터가 해킹을 당하는 등 이상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알고 보니 크리스털 안에는 아주 작은 외계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현미경으로 봐야 보일 정도로 작고, 실리콘이라는 무기질 기반의 생명체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생명체는 대부분 유기질인데, 작고 무기질의 생명체라서 미처 발견을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상당한 지능을 갖춘 생명체라는 걸 알게 된 엔터프라이즈호 승무원들은 해당 지적생명체와 소통을 시도하고, 본인들은 지적 생명체가 있는 행성은 테라포밍 하지 않는다고 얘기를 해서, 서로의 오해를 풀게 되었다는 스토리입니다.
스타트렉에 나온 이 외계인은 반도체와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별다른 능력이 없지만, 여럿이 뭉치면 엄청난 지능을 발휘하게 되죠. 삼체인의 특징과 유사합니다. 삼체인들도 그들의 몸으로 컴퓨터를 만들 수 있죠.
드라마 삼체에서는 사람으로 비유를 했는데, 작은 무기질의 삼체인은 반도체의 트랜지스터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면 될 거 같습니다.
"스타트렉: 넥스트 제너레이션"이 방영되기 전인 70~80년대는 현대적인 반도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때라서, 당시 SF 드라마 작가들에게도 그런 기술의 발달이 영감을 줘서 반도체 같은 외계인이 스타트렉에도 등장한 걸로 보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스타트렉의 해당 에피소드의 시청률은 매우 낮았습니다. 기존의 다른 에피소드와 성격이 많이 달랐기 때문으로 보이는데요. 어떤 평론가는 "오리지널 Star Trek 시리즈와 달리 'Home Soil'은 하드 공상과학소설의 영역을 탐구했다"라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즉, 일반인이 이해하기엔 다소 어려운 설정이 아니었나 싶네요.
삼체 소설은 스타트렉의 해당 에피소드가 나온 지 20여 년이 지난 후에 나왔습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스타트렉에 등장한 외계인이 삼체인의 원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만, 스타트렉에서는 여러 여건상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던 그 외계인을 삼체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는 느낌이네요.
영화 '포드 v 페라리'를 보면 1966년 르망24시 경주에서 세 대의 GT40이 나란히 결승점을 통과한다. 눈 크게 뜨고 봐도 1cm의 오차도 없어 보일 정도로... 그런데, 동시에 들어 올 경우 공동 우승이 아니라, 경기 시작시 좀더 뒤에서 출발한 차가 이긴다는 숨은(?) 규칙 때문에 주인공인 켄 마일즈 대신 멕라렌이 우승하게 된다.
저렇게 정확하게 운전하면서 들어왔다고? 이해는 잘 안되었지만,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다가 나중에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다른 글들 때문에 헷갈리기 시작했다. 영화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결승점 바로 앞에서 멕라렌이 약속을 깨고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순위가 바뀌었다'라는 주장이었다. 맥라렌이 나쁜 짓(?)을 했지만, 영화에서 사실대로 묘사하면 너무 욕을 먹을까봐 적당히 각색해서 찍었다는 추론이 가능한 주장이다. 나는 그가 정말로 그러했는지 궁금해서 당시 기록 영상을 찾아봤다.
12분 즈음에 결승 통과하는 장면 나옴.
영상을 찾아보니 정말로 그렇게 보였다. 영상에서 하늘색 1번이 켄 마일즈의 차량이고, 검정색 2번이 멕라렌이 운전한 차량이었는데 결승점을 통과할 때 확실히 검정색의 2번 맥라렌 차량이 먼저 들어온다. 영화와는 다른 점이다. 그렇다면 그 주장이 사실인 것일까?
그래서 좀더 검색을 해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실제 경기를 설명하는 글들을 읽어 보니 영화와 별로 다르지 않다. 켄 마일즈가 속도를 일부러 늦춘 것도 사실이고, 경기 결과도 1차적으론 무승부(dead heat)였지만, 무승부일 경우 가장 먼 거리를 주행한 차가 우승한다는 룰 때문에 승부가 뒤집어진 것도 사실이라는 글들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왜 저런 오해가 생긴 것일까?
그것은 르망24시 경주만의 독특한 룰 때문이었다.
당시 르망 24시에서 순위를 가르는 기준은 다른 레이싱 경기와 달리 시간이 아닌 거리였다. 이론적으론 24시간을 지난 시점 딱 그 시점의 주행 거리이다. 하지만, 24시간이 경과했을 때 모든 차의 위치를 정확히 기록할 수는 있는 방법이 당시엔 없었기에, 24시간이 지난 후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를 기준으로 총 몇 바퀴를 돌았는지를 비교했다. 굉장히 부정확해 보이지만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1등과 2등 차이가 최소 2~4바퀴 이상 크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대 이상의 차가 같은 바퀴 수를 돌고 들어오는 바람에 그걸 무승부로 간주하고 시작 위치까지 따지는 숨은 룰을 적용해야 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던 걸로 보인다. 1966년 포드 GT40 세 대가 거의 동시에 결승선을 통과하기 전 까지는...
참고로, 1966년 당시 순위는 이렇다. (1, 2위가 같은 바퀴 수를 돌았다.)
1위 : 360 바퀴 - Ford GT40 Mk.II - Bruce McLaren, Chris Amon
2위 : 360 바퀴 - Ford GT40 Mk.II -Ken Miles, Hulme
3위 : 348 바퀴 - Ford GT40 Mk.II -Ronnie Bucknum, Dick Hutcherson
이전에 그런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레이서들도 그런 숨은 룰이 있다는 걸 모르고 경주를 했던 거 같다. 포드 팀에서는 마지막 랩에 들어서야 그런 룰이 있다는 걸 뒤늦게 발견했지만 레이서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동시에 들어오자는 아이디어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나온 거라서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부족했던 거 같다. 결국 그 아이디어는 켄 마일즈가 3관왕을 못하는 참사로 이어졌다. 르망24의 이 애매한 규정은 1971년에 롤링 스타트가 도입 되면서 고쳐졌는데, 바퀴 수가 동일할 경우 총 주행시간이 짧은 차, 즉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인 '결승선에 먼저 들어오는 차가 우승'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결국, 영화에서 차량 3대가 동시에 들어오는 것처럼 보여 준 이유는 지금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당시의 룰을 제한된 시간 안에 관람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지금의 룰과 비슷하게 연출하여 관객들의 혼란을 줄이려 한 일종의 궁여지책으로 보인다.
사족1. 영화를 보면 켄 마일즈가 페라리를 추월하는 장면이 두번 나온다. 첫번째 추월에서는 상대 페라리 드라이버가 그냥 기분 나빠하는 정도이지만, 두번째에는 크게 당황하는데 한바퀴 이상 벌어지면 순위가 확실히 바뀌기 때문이다.
사족2. 당시 우승한 맥라렌은 우리가 아는 유명한 슈퍼카의 그 맥라렌이 맞다. 안타깝게도 켄 마일즈처럼 맥라렌도 1970년에 신형 자동차를 서킷에서 테스트하다 사고로 사망했다.